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명리학은 빅데이터를 토대로 특정한 기후와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갈 확률이 높은지에 대해서 분석하는 학문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미신 혹은 신점으로 오해하는 이유는 사주팔자를 정해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인데, 사주팔자는 인생을 바꾸고 싶은 자신의 욕망과 선택의 결과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끝내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이디푸스가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을 피하려고 집을 떠났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이 배배 꼬이기만 할 때, 벗어나려고 노력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때, 열심을 다했지만 뒤통수 맞을 때 우리는 운명을 떠올리고 팔자를 탓하기도 합니다. 운명이란 굴레에서 벗어날 길은 없을까요? 내릴 비를 오지 않게 할 수는 없지만, 미리 우산이나 우비 정도는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자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운명이란 결국 자신이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책에 나오는 그리스 신화 주인공들의 사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격을 결정하는 요인
'성격이 운명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입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사람은 같은 행동을 딱 한 번만 하지 않습니다. 한 번 특정한 선택을 했다면 그다음에도 같은 선택을 되풀이해야죠. 왜냐하면 그 사람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습관이 되고 성격이 되고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즉 생겨 먹음이 바로 사주팔자입니다. '생긴 대로 논다.', '생각 없이 살면 팔자대로 산다.' 이런 말을 흔히들 합니다. 즉 '생각하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고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가 한 말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팔자는 하기 나름인 모양입니다. 사주는, 미래를 결정하는 힘이 아니라 성격을 결정하는 요인입니다. 대통령이 될 팔자 따위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복이 많은 팔자, 먹을 복 있는 팔자는 있습니다. 일복 많은 팔자는 일을 잘하니 남들이 일을 맡기고, 일이 없으면 스스로 찾아서 하는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먹을 복 있는 팔자는 말 예쁘게 해서 떡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사람이고, 배가 고프면 체면 생각하지 않고 밥 달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흔히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고 있지만, 실은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던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경구입니다. 신에게 뭔가를 묻기 전에 너 자신부터 돌아보라는 이 가르침은 역사상 최고의 신탁으로 꼽힙니다. 사주를 보는 일은 자신을 알려는 노력입니다. 사주팔자가 맞아떨어지는 이유는 생겨먹은 대로 살기 때문이자 생각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팔자를 바꾼다는 것은 자신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사주, 목
그리스 신화 속 비극의 주인공들은 쉽게 말해 드센 팔자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가령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고, 아가멤논은 트로이 원정을 위해 딸을 재물로 바치라고 강요당하고,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를 살해하는 기고한 운명에 처하죠.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을 거부해도, 아가멤논처럼 운명에 순응해도 결국엔 그 끝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비극 속 인물들은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까요? 저자는 신화 속 인물의 사주에서 넘치거나 부족한 성질을 분석하고, 궁극에는 어떻게 해야 팔자에 없거나 부족한 오행과 십성을 보충해서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 알려줍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신 프로메테우스입니다. 제우스는 인간을 사랑하고 불을 졌다는 이유로 프로메테우스를 세상 끝 절벽에 매달아서 독수리가 그의 간을 파먹게 명령하죠. 또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신들의 왕자에 앉히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그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절벽에 매달린 주제에 프로메테우스는 자존심만은 끝까지 양보하지 못합니다. 당장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보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상황이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죠. 따뜻한 마음, 저돌적인 추진력, 어린아이 같은 과시욕,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 사주에서는 이 모두를 하나의 요인에서 비롯한 성격으로 보는데 바로 나무, '목'입니다. '목'은 하루로 보자면 해가 뜨는 새벽의 기운이고 계절로 보면 봄의 기운입니다. 음의 세상에서 양의 세상을 여는 힘입니다. 차갑게 얼어붙은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의 모습에서 봄의 기운을 나무와 연결시킵니다. '목'은 태생적으로 땅을 뚫고 나오는 힘인데, 장애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땅 밖의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래서 시작의 힘이고 도전의 힘입니다. 하지만 '목'은 땅을 뚫고 나가 새로운 세상에서 높이 솟아오르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정작 열매를 맺는 일은 관심 밖입니다. 그래서 시작은 거창한데 결과물은 초라하기 쉽습니다.
오케아노스의 사주, 병화
한편 절벽에 매달린 프로메테우스를 위로하기 위해서 삼촌 오케아노스가 찾아옵니다. 내가 그대보다 더 존경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어떻게 그대를 도울 수 있는지 말해보라라고 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일부러 먼 길을 찾아와 준 삼촌이 반가워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제우스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분통을 터뜨립니다. 그러나 오케아노스는 프로메테우스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합니다. 고통받는 조카를 위로해 주러 온 줄 알았더니 갑자기 청하지도 않은 충고를 시작합니다. 오케아노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자신이 제우스를 찾아가서 선처를 부탁해 보겠노라고 말합니다. 프로메테우스가 보기엔 오케아노스의 행동은 순진하고 불필요한 오지랖이었습니다. 제우스가 왜 가혹한 처벌을 가하는지, 프로메테우스는 왜 끝까지 저항하려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오케아노스 자신의 선의만을 앞세운 행동이었습니다. 전형적인 병화의 특성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오케아노스입니다. 불에는 태양을 뜻하는 병화와 모닥불이나 용광로를 뜻하는 정화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병화는 불의 속성 중 빛, 밝음에 속하고, 정화는 열, 따뜻함에 속합니다. 모닥불은 해가 떨어진 뒤에 위력을 발휘하는데, 해가 떨어진 뒤에야 앞이 캄캄한 사람들에게는 빛이 되어주고, 추운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화는 주변을 따뜻하게 보듬는 온화한 성격을 가집니다. 늘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때문이죠. 반면 병화는 정화와 달리 아무도 안 시켰는데 혼자서 세상을 구하겠다고 설칩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온 세상을 비추는 태양이기 때문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내는 목표, 돌진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순진함, 상대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독선,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을 때 분노 폭발. 이 모든 오케아노스의 성격은 병화의 특징을 여지없이 보여줍니다.